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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 (김종호 사단장,국군 9사단)

by 시간의 서재 2026. 3. 24.

1952년 10월, 백마고지는 대한민국 국군의 자존심이 걸린 전장이었습니다.

중국군 정예부대인 38군과 국군 9사단이 단 한 고지를 두고 10일간 12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28만 발의 포탄이 쏟아진 이 전투는 승리의 이면에 감춰진 희생과 헌신, 그리고 전쟁의 참혹함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한국전쟁 -출처:나무위키>

김종호 사단장의 철저한 사전 준비와 현장 지휘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를 이끈 핵심 인물은 김종호 9 사단장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초기 춘천 전투 방어에 성공한 유능한 장군으로 평가받았지만,

1951년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큰 실패를 경험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백마고지 전투는 그에게 중공군과의 설욕전이라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김종호 사단장의 승리 비결은 정보를 믿고 즉각 대비한 지휘력에 있었습니다.

전투 3일 전인 10월 3일, 중국군 장교 1명이 귀순해 공격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식량과 탄약 비축, 통신선 심층 매설, 사격 구역 사전 설정 등을 지시했습니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가 없었다면 1952년 10월 6일 오후 7시 15분에 시작된

중국군 38군의 기습 공격을 막아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중국군 38군은 중국군 내부에서도 정예 부대로 평가받던 부대였습니다.

과거 미군 사단을 괴멸시킬 정도로 전투력이 강했고, 마오쩌둥에게 '만세군'이라는 칭호까지 받은 부대였습니다.

백마고지 공격을 위해 약 3개월간 고지전 전문 훈련도 받았습니다.

더욱이 중국군은 본격 공격 전에 교란 작전을 먼저 펼쳤습니다.

백마고지 후방의 역곡천을 범람시키기 위해 수문을 폭파해 국군의 증원과 보급을 차단하려 했고,

그 결과 국군 9사단은 고립에 가까운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했습니다.
김종호 사단장은 후방에만 머물지 않고 전방 가까이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며 현장 지휘를 이어갔습니다.

10월 7일 밤, 결국 백마고지 주봉을 중국군에 처음으로 빼앗겼지만, 국군은 포기하지 않고 즉시 반격에 나섰습니다.

10월 8일 새벽 2시 40분, 국군은 다시 주봉 탈환에 성공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주봉은 빼앗겼지만 78 고지 능선 등 주변 거점을 완전히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발판으로 후속 부대가 비교적 유리하게 주봉을 다시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육탄돌격으로 지켜낸 고지, 희생 위에 세운 승리

백마고지 전투에서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은 10월 12일에 펼쳐진 육탄돌격이었습니다.

국군은 고지 정상 바로 앞 50m 지점까지 접근했지만 적 기관총에 막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때 강승우 소위, 오규봉 하사, 안영권 하사가 폭탄을 들고 적 진지로 돌진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들의 희생으로 전세가 뒤바뀌었지만, 세 사람 모두 전사했습니다.
첫날밤 전투는 포신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격렬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포를 너무 많이 쏴서 물을 끼얹어 식히고, 포상을 고정하면서 밤새 사격을 이어갈 정도였습니다.

이는 백마고지 전투가 시작부터 극한의 화력 전이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10월 6일부터 7일까지 단 하루 동안 네 차례 공방전이 벌어졌고,

국군은 중국군의 기습을 가까스로 막아내며 첫 고비를 넘겼습니다.
철저히 준비했음에도 중국군은 계속 밀어붙이며 국군 최후 저지선까지 돌파하려 했습니다.

국군은 극한 위기 속에서 진내사 격이라는 최후 수단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적이 진지 코앞까지 들어온 상황에서 아군 진지 바로 앞에 포격을 요청하는 위험한 전술로,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음을 보여줍니다.
중국군 역시 반드시 백마고지를 점령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적 교신에는 "백마고지를 탈취하지 못하면 사단장을 총살하겠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만큼 양측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었고, 고지 주인이 몇 시간 단위로 바뀌는 극한 공방전이 이어졌습니다.

10월 6일부터 12일까지 무려 12차례 공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희생과 헌신 속에서 우리는 전쟁이 단순히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비극임을 깨닫게 됩니다.

국군 9사단이 지켜낸 자존심과 28만 발의 포탄

백마고지 전투는 단지 땅 한 조각을 두고 벌인 싸움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군의 자존심이 걸린 전투였습니다.

전투 열흘 동안 백마고지에는 무려 28만 발의 포탄이 떨어졌습니다.

이는 한국전쟁 중 단일 면적당 가장 많은 포탄이 사용된 전투였습니다.

백마고지가 왜 '참혹한 전장'으로 기억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1952년 10월 13일, 이승만 대통령과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직접 백마고지를 방문했습니다.

이는 백마고지 전투가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전 국민적 관심사였음을 보여줍니다.

밴 플리트 장군도 한국군 9사단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하며 격려했습니다.

이러한 관심과 격려는 전투 중인 국군 장병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전투 막바지, 국군이 백마고지 주봉에 태극기를 꽂는 장면은 이 전투의 상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0일 동안 무려 7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던 백마고지 정상은 1952년 10월 15일 최종적으로 국군이 완전히 사수했습니다.

이 장면은 백마고지 전투가 국군의 의지와 희생으로 지켜낸 승리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승리라는 단어 뒤에는 너무나 큰 희생이 있었습니다.

국군 9사단은 수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고지를 지켜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병력이 소모되었습니다. 당시 지휘관들의 판단이 최선이었는지,

병사들은 명령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였는지,

생존 장병들은 이 전투를 어떻게 기억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분명 중요하지만, 그 이면의 인간적 고통과 희생을 함께 기억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 계승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백마고지 전투는 국군의 전투력과 의지를 증명한 역사적 승리였지만,

동시에 전쟁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이기도 합니다.

김종호 사단장의 지휘력, 강승우 소위와 오규봉·안영권 하사의 육탄돌격,

그리고 국군 9사단 전체의 헌신은 오늘날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평화를 지켜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3OKFZxc_7Vo